기드온 이야기
포도주 틀에 숨은 큰 용사
밀은 본래 탁 트인 타작마당에서 떨어야 합니다. 바람이 불어야 겨가 날아가고 알곡이 남으니까요. 그런데 한 사내가 바람 한 점 들지 않는 포도주 틀 안에 웅크리고 앉아 밀을 떨고 있습니다. 먼지가 자욱하고 숨이 막혀도 어쩔 수 없습니다. 밖에서 타작하다 들키면 미디안 사람들이 메뚜기 떼처럼 몰려와 한 해 농사를 통째로 쓸어 갈 테니까요. 벌써 일곱 해째입니다.
그 숨죽인 사내에게 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삿 6:12)
기드온은 아마 뒤를 돌아보았을 겁니다. 누구한테 하는 말인가 싶어서요.
하나님은 지금의 나를 부르지 않으신다
기드온의 첫 대답은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볼멘소리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면 왜 우리가 이 꼴이냐고, 조상들이 말하던 그 기적은 다 어디 갔느냐고 되묻습니다. 그리고 자기 이야기가 나오자 한껏 움츠러듭니다. 우리 집안은 므낫세 중에서도 가장 약하고, 나는 그 집에서도 가장 작은 자라고요.
눈여겨볼 것은 하나님이 이 말에 반박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아니다, 너는 사실 대단하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삿 6:16)
"큰 용사"라는 호칭은 기드온의 현재에 대한 평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그가 되어 갈 모습에 대한 선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포도주 틀 속의 겁쟁이를 보시면서 동시에 횃불을 든 용사를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양털 두 뭉치의 믿음
부르심을 받고도 기드온은 선뜻 나서지 못합니다. 첫 임무였던 바알 제단을 허는 일도 사람들이 무서워 한밤중에 몰래 했습니다. 그러고는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놓고 표징을 구합니다.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게 해 달라고요. 그대로 이루어지자 이번엔 거꾸로, 양털만 마르게 해 달라고 한 번 더 구합니다.
참 답답한 사람이다 싶지만, 하나님은 꾸짖지 않으시고 두 번 다 들어주십니다. 의심 많은 사람의 걸음 속도에 맞춰 함께 걸어 주시는 하나님. 기드온 이야기에서 가장 따뜻한 대목이 아닐까 합니다. 믿음은 의심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의심을 품은 채로도 하나님 앞에 그것을 들고 나아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덜어내시는 하나님
드디어 3만 2천 명이 모였습니다. 골짜기를 메운 미디안 대군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뜻밖입니다.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다."
두려운 자는 돌아가라 하니 2만 2천 명이 떠납니다. 남은 1만 명도 많다 하십니다. 물가에서 손으로 물을 움켜 핥아 마신 3백 명만 남기고 다 돌려보내십니다.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삿 7:2)고 자랑할까 해서입니다. 세상은 더해야 이긴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은 덜어내야 보인다고 하십니다. 내 힘이 빠져나간 자리에 비로소 하나님의 손이 드러납니다.
깨어진 항아리에서 나오는 빛
그 밤에도 기드온은 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를 적진 가까이 내려보내 미디안 병사의 꿈 이야기를 엿듣게 하십니다. 보리떡 한 덩이가 굴러와 장막을 무너뜨렸다는 꿈이었습니다. 보리떡은 가난한 사람의 양식입니다. 보잘것없는 보리떡 같은 기드온이 하나님의 손에서 쓰임 받으리라는 격려였지요.
3백 명의 손에 들린 것은 칼이 아니었습니다. 나팔과 빈 항아리, 그리고 그 안에 감춘 횃불이었습니다. 한밤중, 신호와 함께 항아리가 일제히 깨어지자 감춰졌던 불빛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고, 미디안 진영은 혼란에 빠져 저희끼리 칼을 휘두르다 무너졌습니다.
빛은 항아리가 깨어질 때 드러났습니다. 훗날 바울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후 4:7)고 말한 것이 떠오릅니다. 질그릇이 단단하고 번듯할 때가 아니라, 금이 가고 깨어질 때 그 안의 빛이 새어 나옵니다.
승리 이후가 더 어렵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백성이 왕이 되어 달라고 청했을 때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삿 8:23)며 훌륭하게 거절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입으로 전리품 금귀고리를 거두어 금 에봇을 만듭니다. 기념하려던 그 물건은 결국 온 이스라엘이 음란하게 섬기는 우상이 되었고, 성경은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포도주 틀의 두려움은 이겼지만 승리 뒤의 자기 기념은 이기지 못했습니다. 약할 때보다 강해졌을 때가 더 위험하다는 것을 성경은 숨기지 않고 보여 줍니다.
오십, 육십의 우리에게
이 나이쯤 되면 우리 손에서도 많은 것이 덜어집니다. 직함이 떠나고, 자식들이 떠나고, 체력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3만 2천이던 것이 어느새 3백이 된 듯한 허전함. "이제 내가 무슨 쓸모가 있나" 싶어 저마다의 포도주 틀 안으로 움츠러들기 쉬운 때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이야기는 다르게 말해 줍니다. 덜어짐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드러날 준비일 수 있다고요. 젊은 날의 단단하던 항아리에 금이 가기 시작한 지금이 어쩌면 그 안의 빛이 비로소 새어 나올 때인지도 모릅니다. 실패해 본 사람의 위로, 아파 본 사람의 기도, 내려놓아 본 사람의 너그러움은 깨어진 자리에서만 나오는 빛입니다.
한편으로 이 나이는 이룬 것을 기념하고 싶어지는 나이이기도 합니다. 내가 일군 것, 내가 버틴 세월, 내가 키운 자식. 그것들이 감사의 제목으로 남으면 은혜지만, 나를 증명하는 금 에봇이 되면 올무가 됩니다. 기드온은 우리에게 용기와 경계를 함께 가르쳐 주는 사람입니다.
함께 생각해 볼 질문
- 지금 내가 숨어 있는 '포도주 틀'은 어디입니까? 무엇이 두려워 그 안에 머물러 있습니까?
- 최근 내 삶에서 덜어진 것은 무엇입니까? 그 빈자리에서 하나님이 보여 주시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 내가 은근히 붙들고 있는 '금 에봇', 곧 하나님보다 내 공로를 기념하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까?
항아리는 깨어질 때 빛을 내고, 사람은 작아질 때 하나님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