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야기

나흘째 되던 날

터키옥13 2026. 7. 14.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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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니 마을 어귀에 곡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은 지 벌써 나흘, 무덤은 굴 입구에 큰 돌로 막혀 있고 그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조문객들 사이에서 눈이 붓도록 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의지했던 자매인데, 정작 오라버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예수님은 곧바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나흘이 지나서야 도착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늦으셨을까

마르다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한복음 11:21). 원망이라기보다는, 오래 알고 지낸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서운함이었을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이런 순간을 만납니다. 분명히 기도했는데, 분명히 신실하게 살았는데, 정작 필요한 순간에 하늘은 잠잠하고 시간은 무심히 흘러가 버리는 순간 말입니다. 나흘이라는 시간은 유대인들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혼이 사흘까지는 시신 곁을 맴돈다고 믿었기에, 나흘째는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을 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돌이킬 수 없다는 순간까지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우신 것도, 명하신 것도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요한복음 11:35). 죽음을 이기실 분이 먼저 슬퍼하셨다는 사실이 마음을 붙듭니다. 그러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요한복음 11:43). 죽은 자를 살리는 데는 긴 설명도, 요란한 의식도 필요 없었습니다. 이름을 부르시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수족이 베로 동인 채로 나사로가 걸어 나왔을 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슬픔은 순식간에 다른 언어로 바뀌었습니다.

 

오늘의 우리에게

인생의 절반을 훌쩍 넘긴 자리에서 돌아보면, 우리에게도 저마다의 나흘이 있었을 것입니다. 부모님을 먼저 보낸 자리, 오래 붙들었던 일이 끝내 무너진 자리, 기도의 응답이 너무 늦게 와서 이미 늦었다고 체념했던 자리 말입니다. 그런데 나사로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시간이 우리의 시간과 다르게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늦으신 것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어 보이는 자리에서까지 이름을 부르실 계획을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무덤 앞에서 함께 우시는 분이, 동시에 무덤을 여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오늘 곱씹어 볼 물음

  • 내 삶에서 "이미 늦었다"고 체념하고 돌을 굳게 막아버린 무덤은 어디입니까.
  •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던 시간을, 지나고 나서 다시 돌아본다면 어떻게 보입니까.
  • 지금 내 이름을 부르고 계시다면, 나는 베로 동인 채로라도 걸어 나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덤 앞에 서면, 침묵도 응답의 한 형태였음을 나중에야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