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 이야기
같은 이야기, 세 개의 마음
돌아온 탕자를 세 사람의 눈으로 다시 읽기
같은 사건도, 누구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돼요.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는 세 사람이 나와요. 떠난 아들, 기다린 아버지, 그리고 끝까지 집에 남아 있던 형. 우리는 보통 "집 나갔다 돌아온 동생"에게만 눈길을 주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세 사람 모두의 이야기예요.
오늘은 그 세 마음속으로 한 번씩 들어가 볼게요.
1. 떠난 아들의 시선
솔직히 말할게. 나는 집이 답답했어.
아버지는 좋은 분이셨어. 그건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어. 그런데 바로 그게 문제였는지도 몰라. 너무 다 괜찮은 집.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정해진 자리에 앉고, 정해진 대로 사는 하루. 나는 그 바깥이 궁금했어. 진짜 내 삶은 저 너머에 있을 것 같았거든.
그래서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했어. "아버지, 제 몫의 재산을 미리 주세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말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알아. 유산은 원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받는 거니까. 그러니까 나는 사실상 "아버지가 안 계신 셈 치고 살고 싶어요"라고 말한 거였어. 그런데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나눠 주셨어. 그때 나는 그게 사랑인 줄도 몰랐어. 그냥 "됐다, 자유다" 했지.
먼 나라는 정말 좋았어. 처음엔. 돈이 있으니까 친구도 많았고, 매일이 잔치였어. 그런데 돈이 떨어지니까 친구도 같이 떨어지더라. 게다가 그 나라에 흉년까지 들었어. 결국 나는 돼지를 치게 됐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고 싶을 만큼 배가 고팠는데, 그것조차 주는 사람이 없었어.
그 바닥에서, 어느 날 문득 정신이 들었어.
"우리 아버지 집에는 일꾼들도 양식이 남아도는데… 나는 왜 여기서 굶어 죽고 있지?"
집에 돌아가기로 했어. 가는 내내 할 말을 외웠어.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어요. 이제 아들이라 불릴 자격도 없으니, 그냥 일꾼 하나로 써 주세요." 그 말을 백 번도 더 연습했던 것 같아.
그런데 아직 집이 멀리 보이기만 할 때, 누가 막 달려오는 게 보였어.
아버지였어.
나는 외운 말을 꺼내려했는데, 끝까지 하지도 못했어. 아버지가 나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셨거든. 그러고는 종들에게 외치셨어. "제일 좋은 옷을 가져와라.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라.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나는 품꾼 자리 하나만 바랐는데, 아버지는 나를 다시 아들로 받아 주셨어.
2. 기다린 아버지의 시선
그 아이가 재산을 미리 달라고 한 날, 나는 사실 마음이 무너졌단다.
하지만 붙잡지 않았어. 억지로 붙잡아 둔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거든. 사랑은 떠날 자유까지 주는 거니까. 그래서 나는 그 아이의 몫을 떼어 주고, 떠나는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그날부터 저녁마다 나는 길이 보이는 곳에 나가 섰어.
다들 "이제 그만 잊으세요" 했지. 하지만 부모 마음이라는 게 그런 게 아니란다. 밥상에 빈자리가 하나 있으면, 그 자리만 보여. 나는 매일 같은 길을 바라봤어. 오늘은 올까, 오늘은 올까.
그러던 어느 날, 저 멀리 한 사람이 보였어.
다른 사람은 못 알아봤을 거야. 너무 야위고, 너무 초라해서. 하지만 나는 단번에 알았다. 그 걸음걸이, 그 어깨. 내 아들이었어.
나는 달렸어.
너희는 모를 거야. 그 시절, 나이 든 사람이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뛰는 건 정말 체면 깎이는 일이었단다. 사람들이 다 흉봤겠지.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니. 내 아들이 돌아오는데. 사랑은 체면을 따지지 않아.
그 애가 외워 온 사과의 말을 꺼내려했어. 일꾼으로 써 달라고. 하지만 나는 끝까지 듣지 않았어. 들을 필요가 없었거든. 돌아온 것만으로 충분했으니까.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잔치를 열었지.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
그런데… 잔치 한가운데서, 나는 또 한 아이가 생각났어.
밖에 서 있던 큰아들.
그래, 나에게는 아들이 둘이란다. 나는 두 아들 모두를 위해 밖으로 나갔어. 한 번은 돌아오는 아이를 맡으러, 또 한 번은 들어오지 못하는 아이를 데리러.
3. 남은 아들의 시선
나는 평생 한 번도 집을 떠난 적이 없어요.
아버지 말씀 어긴 적도 없고, 새벽부터 밭에 나가 일했고, 동생이 재산 챙겨 떠난 뒤에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킨 사람은 바로 나예요. 누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그게 맞는 거라고 믿었으니까.
그날도 밭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그런데 집에서 음악 소리가 났어요. 잔치였죠. 종에게 물었더니, 동생이 돌아왔고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대요.
… 화가 났어요. 솔직히 너무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나는 이렇게 오래, 이렇게 성실하게 곁을 지켰는데. 아버지는 나에게 친구들이랑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잖아요. 그런데 재산을 다 날려먹은 저 애가 오니까, 제일 좋은 송아지를 잡으시다니.
그때 깨달았어요. 나는 집에 있었지만, 마음은 사실 한 번도 아버지 곁에 있지 않았다는 걸. 나는 아들이 아니라 일꾼처럼 굴고 있었던 거예요. 사랑을 받으려고 점수를 쌓는 사람처럼. 그래서 동생이 점수도 없이 사랑받는 게 견딜 수 없었던 거고요.
아버지가 또 밖으로 나오셨어요. 이번엔 나한테.
명령하지 않으셨어요. 달래셨어요.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하지만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니, 우리가 기뻐하는 게 마땅하지 않겠니."
…그래서 내가 결국 잔치에 들어갔냐고요?
그건 이야기에 안 나와요.
닫는 이야기
예수님은 이 비유를 일부러 끝맺지 않으셨어요.
큰아들이 결국 잔치에 들어갔는지, 끝까지 문밖에 서 있었는지 — 알려 주지 않으세요. 왜일까요?
아마 그 마지막 질문이, 사실은 이 이야기를 듣는 우리를 향한 질문이기 때문일 거예요.
너는 지금 어느 아들이니?
저 멀리 떠나 바닥을 헤매다 "이제 돌아갈까" 망설이는 둘째일 수도 있고, 집에 있으면서도 마음이 멀어진 채 누군가의 행복을 시샘하는 첫째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어쩌면, 어떤 날은 둘째였다가 또 어떤 날은 첫째이기도 하겠죠.
다만 변하지 않는 게 하나 있어요.
두 아들 다, 아버지가 먼저 밖으로 나와 맞아 주셨다는 것.
돌아오는 길에도, 들어오지 못하는 문밖에도, 아버지는 늘 먼저 나와 계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