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을 들고 잃은 드라크마 비유, 잊혀진 것에 관하여
여인에게는 열 드라크마가 있었다.
그중 하나를 잃어버렸다. 은전 한 닢. 전 재산의 십분의 일이었다.
그는 등불을 켰다. 빗자루를 들었다. 집 구석구석을 쓸며 찾기 시작했다. 어두운 방바닥을, 문틈을, 가구 밑을. 날이 밝을 때까지 그렇게 찾았다.

열 개 중 하나
누가복음 15장의 짧은 비유다. 앞뒤로 잃은 양 이야기와 돌아온 아들 이야기가 붙어 있어서, 세 이야기 중 가장 짧고 조용하게 지나가기 쉽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다른 두 이야기에 없는 것이 하나 있다.
양은 스스로 걸어서 길을 잃었다. 아들은 스스로 걸어서 집을 떠났다. 둘 다 저마다의 이유로, 저마다의 발로 멀어졌다.
하지만 드라크마는 다르다. 은전은 스스로 구르지 않는다. 아무 의지도, 잘못도 없이 그저 어딘가 떨어졌을 뿐이다. 어두운 구석에 박혀서, 자기가 잃어버려진 줄도 모른 채 가만히 있다.
잃어버려졌다는 것
여인은 등불을 켠다. 밤에, 좁은 흙바닥 집 안에서 동전 하나를 찾으려면 빛이 있어야 한다. 그러고는 비로 쓸기 시작한다. 자기 손으로 지은 먼지, 자기 집의 어둠을 온통 헤집으면서.
주목할 것은, 이 은전이 값어치를 잃은 게 아니라는 점이다. 구석에 박혀 있어도 여전히 한 드라크마였다. 다만 보이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아무도 그 존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리에 놓여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그 동전이 스스로 빛나서 발견된 게 아니라 — 누군가 등불을 들고 나서서 찾았기 때문에 발견되었다고 말한다.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시간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그런 자리가 온다. 존재는 그대로인데,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는 자리.
젊을 때는 이름으로 불렸다. 나이가 들면서는 점점 역할로 불린다.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빠, 어느 부서의 부장, 어느 집의 어른. 그 역할들이 다 지나가고 나면, 이상하게도 정작 내 이름 석 자로 나를 불러주는 사람이 드물어진다.
퇴직 이후, 자녀가 독립한 이후, 혹은 그저 오래 살다 보니 — 자기 존재가 구석에 놓인 동전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값어치가 사라진 게 아니다. 다만 아무도 그 자리를 비추지 않는 것뿐이다.
요즘의 나에게
이 비유에서 여인은 잃은 동전을 찾자마자 이웃과 벗을 불러 모아 말한다.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겨우 동전 한 닢을 찾은 일로 잔치를 벌인다.
그 장면이 말해주는 건 이거다. 잃어버려진 존재를 찾아내는 일은, 그 자체로 기뻐할 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것. 구석에 놓여 잊힌 것 같은 시간에도, 누군가는 등불을 들고 찾아 나설 만큼 그 존재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
지금 스스로 잊힌 것 같다고 느껴진다면, 그건 값어치가 없어져서가 아니라 그저 불빛이 닿지 않는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그 불빛이 결국 온다고 말한다.
생각해볼 질문
- 나는 요즘 어떤 이름, 어떤 역할로 불리고 있는가? 그중 정말 '나'인 이름은 무엇인가?
- 내 존재가 잊힌 것 같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다면, 그건 언제였는가?
-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 등불을 들고 찾아 나서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