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 시편 37편 6~7절
"그가 네 공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로 말미암아 불평하지 말지어다" [시편 37:6~7]

동창회에 다녀온 날이었다. 정직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던 사람인데, 요령 있게 살아온 친구의 형편이 훨씬 넉넉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 한구석이 자꾸 뒤틀렸다. "나는 뭘 위해 그렇게 아등바등 바르게 살았나."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지만, 그 밤 내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질문이었다.
시편 기자도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악한 꾀를 부리는 자의 길이 형통한 것을 보며 속이 끓었다. 그런데 그가 내린 결론은 뜻밖이다.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것도, 상대를 심판해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참으며, 기다리라는 말이었다.
빛은 스스로 나타난다
시편은 하나님이 "네 공의를 빛 같이, 네 의를 정오의 빛 같이 나타내시리라"고 말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동사의 주어다. 나타내는 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내 억울함을 내가 증명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빛은 스스로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비칠 뿐이고, 어둠은 저절로 물러난다. 억울한 일을 겪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해명하고, 증명하고, 상대의 부당함을 낱낱이 밝히려 든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다른 길을 가리킨다. 정오의 햇빛이 굳이 자기가 밝다고 말하지 않듯, 바르게 산 삶은 언젠가 스스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잠잠함은 포기가 아니다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는 말을 체념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에서 이 잠잠함은 무기력한 침묵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자세다. 말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항변을 하나님께 맡기고 내 입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 나이가 되면 억울한 일 앞에서 예전처럼 쉽게 흥분하지 않게 된다고들 한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신뢰에서 온 잠잠함인지, 아니면 지쳐서 포기한 침묵인지는 스스로도 헷갈릴 때가 있다. 시편이 말하는 잠잠함은 후자가 아니다. 여전히 마음은 살아 있고, 여전히 옳고 그름을 분별하되, 그 판단을 스스로 손에 쥐지 않고 맡기는 것이다.
형통해 보이는 것과 실제로 형통한 것
시편 기자를 힘들게 한 것은 단순한 손해가 아니라 "형통해 보이는" 남의 길이었다. 요령 부린 사람이 잘 사는 것 같고, 정직하게 산 나는 손해만 본 것 같은 그 비교가 마음을 갉아먹는다.
그러나 오래 살아본 사람은 안다. 그 시절 부러워 보였던 이의 삶이 몇십 년 뒤에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반대로 그때는 손해처럼 보였던 정직함이, 지금 와서 보면 관계와 평판과 마음의 평안으로 되돌아와 있는 경우도 많다. 형통은 그 순간의 저울로는 잘 재어지지 않는다.
오늘의 적용
억울한 비교가 마음을 흔드는 날,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그 마음을 억누르거나 애써 잊으려 하지 말고, 시편 기자처럼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지금 내 마음이 흔들리는구나." 그리고 그 자리에서 딱 한 문장만 덧붙여보는 것이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겠습니다." 결론을 내는 것도, 항변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오늘 하루 그 세 단어를 마음에 놓아두는 것으로 충분하다.
함께 나누고 싶은 질문
- 요즘 나를 흔드는 '형통해 보이는 남의 길'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 억울함을 스스로 해명하고 증명하려 애썼던 순간이 있었나요? 그때 마음은 어땠나요?
-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는 말을 내 삶의 한 장면에 적용한다면, 오늘은 무엇부터 내려놓아야 할까요?
정오의 빛은 스스로 밝다고 말하지 않으며, 다만 어둠이 그 앞에서 조용히 물러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