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다니 마을의 공기는 무거웠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기별을 받고도 예수님은 이틀을 더 머무셨고, 그 사이 나사로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라비를 무덤에 눕히고 나흘째를 맞고 있었습니다. 이미 몸에서는 냄새가 난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릴 만큼,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죽음이었습니다. 조문객들의 곡소리가 골목을 채우던 그 마을에, 예수님이 마침내 도착하셨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마르다가 먼저 뛰어나가 예수님을 맞았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원망과 믿음이 뒤섞인 이 한마디에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품어보았을 질문이 들어 있습니다. 왜 하필 그때 안 계셨습니까. 왜 조금 더 일찍 오지 않으셨습니까. 인생의 절반을 훌쩍 넘긴 자리에서 돌아보면, 우리도 저마다 그런 나흘을 지나온 적이 있을 것입니다. 기도했지만 응답이 늦었던 시간, 이미 늦어버렸다고 체념했던 순간들 말입니다.
눈물 흘리시는 하나님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부활과 생명에 대해 말씀하신 뒤, 마리아와 함께 슬퍼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한복음 11장 35절). 성경에서 가장 짧은 이 한 구절은, 하나님이 우리의 슬픔 앞에서 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함께 우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조용히 증언합니다. 무덤 앞에 이르러 예수님은 돌을 옮기라 명하시고,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걸어 나왔습니다.
오늘의 우리에게
우리는 종종 이미 늦었다고 스스로 판정을 내립니다. 관계가 끊어진 지 오래되었다고, 병이 깊어졌다고, 마음이 굳어버린 지 너무 오래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나흘이 지난 무덤 앞에서도 부르시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시계로는 이미 끝난 일도,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부르심 앞에 우리가 돌을 옮길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것이 남은 질문일 것입니다.
오늘 곱씹어 볼 물음
- 나는 지금 어떤 무덤 앞에서 "이미 늦었다"고 단정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예수님처럼 함께 울어주는 존재가 되어본 적이 언제였습니까.
- 부르시는 음성 앞에서 내가 치워야 할 돌은 무엇입니까.
무덤 앞에서 흘리신 눈물은, 죽음보다 사랑이 먼저라는 것을 말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