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다니 마을 어귀에는 벌써 나흘째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가 세상을 떠난 지 나흘, 무덤 앞에는 조문객들이 무리 지어 서 있었고, 공기 중에는 옅은 부패의 냄새가 스며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낮은 목소리로 수군거렸습니다. "그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셨다더니, 왜 이렇게 늦게 오셨을까."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틀을 더 머무르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하셨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이미 돌로 막힌 무덤이었습니다.
마르다의 원망, 마리아의 눈물
마르다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말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한복음 11장 21절). 원망이라기보다는, 차마 삼키지 못한 슬픔에 가까운 말이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도 같은 말을 반복하며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울었습니다. 두 자매는 같은 문장을 말했지만, 그 문장 안에 담긴 것은 각자 다른 무게의 상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앞에서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짧게, 그러나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한복음 11장 35절). 죽음 앞에서 함께 울어주신 것입니다. 답을 먼저 주신 것이 아니라, 슬픔 곁에 나란히 서주신 것입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눈물을 흘리신 후, 예수님은 무덤으로 걸어가 명하셨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요한복음 11장 39절). 마르다는 나흘이나 지나 냄새가 날 것이라며 주저했습니다. 인간의 계산으로는 이미 늦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시며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요한복음 11장 43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걸어 나왔습니다.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것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두 눈으로 확인한 순간이었습니다.
오늘의 우리에게
인생의 절반을 훌쩍 넘긴 자리에서 돌아보면, 우리에게도 이미 돌로 막아버린 무덤이 몇 개쯤은 있는 것 같습니다. 회복될 수 없다고 스스로 단정 지은 관계, 이미 늦었다고 체념해버린 꿈, 냄새가 날 것이 두려워 차마 다시 열어보지 못한 상처들 말입니다. 나사로 이야기는 그 돌을 대신 옮겨주시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먼저 그 돌을 옮기라고 명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손으로 감당하기 버거운 순간에도, 믿음으로 한 걸음 그 돌 앞에 서라는 초대인 셈입니다.
오늘 곱씹어 볼 물음
- 내 삶에서 "이미 늦었다"고 단정 지어 버린 것은 무엇입니까.
- 슬픔 앞에서 나는 누군가와 함께 울어준 적이 있습니까, 혹은 누군가 나와 함께 울어준 적이 있습니까.
- 지금 내가 옮겨야 할 돌은 무엇이며, 그것을 옮길 용기가 있습니까.
나흘이나 지난 무덤 앞에서도, 부르는 음성은 늦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