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 위의 사람
여리고의 좁은 길에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찼습니다. 예수라는 분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이 돌았거든요. 그런데 그 인파의 가장자리, 누구도 자리를 비켜 주지 않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키가 작아 까치발을 들어도 사람들의 등밖에 보이지 않던 그는, 결국 체면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길가의 뽕나무 위로 기어올랐습니다.
그의 이름은 삭개오. 세리장이었고,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동네에서 가장 미움받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가진 자의 외로움
세리는 로마를 위해 동족에게서 세금을 걷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정해진 것보다 더 받아 챙기는 일이 흔했으니, 사람들 눈에 삭개오의 재산은 곧 이웃의 눈물로 쌓아 올린 탑이었습니다. 세리장이었으니 그 시선은 몇 배로 무거웠겠지요.
흥미로운 건, 누가복음이 그를 묘사하며 굳이 "부자였더라"라고 적어 둔 점입니다. 가진 것은 많았지만, 그가 정작 얻지 못한 것이 있었다는 뜻일까요. 사람들 틈에 섞이지 못해 나무 위로 올라가야 했던 그 모습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성공한 사람'의 풍경과는 사뭇 다릅니다.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곁이 비어 가는 경험. 어쩌면 살아오며 한 번쯤 스쳐 본 적 있는 외로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먼저 불린 이름
예수님이 그 나무 아래 멈춰 서십니다. 그리고 위를 올려다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르게 됩니다. 군중 속 누구도 그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른 적이 없었을 텐데, 예수님은 그를 알아보시고 이름으로 부르셨습니다. 그가 무언가를 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회개의 말을 꺼내기도 전이었으니까요. 환대가 먼저였고, 변화는 그 뒤에 따라왔습니다.
이 순서가 참 마음에 남습니다. 우리는 보통 '내가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 받아들여진다'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삭개오의 자리에서는 그 순서가 뒤집힙니다. 받아들여진 다음에, 비로소 사람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흘려보내는 법을 배운 사람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요. 그때 삭개오가 일어서서 말합니다.
"주님, 보십시오.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았다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누가 시킨 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재산을 내놓으라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그의 집에 머물겠다 하셨을 뿐인데, 삭개오 안에서 무언가가 스스로 터져 나왔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그가 모든 것을 다 버리겠다고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절반을 나누고, 빼앗은 것은 갚겠다고 했습니다. 부 자체가 죄였던 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흘려보내야 할지를 그날 처음 알게 된 사람의 고백이었습니다. 움켜쥐기만 하던 손이, 비로소 펴지기 시작한 순간이지요.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인자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다."
오늘의 우리에게
인생의 절반을 훌쩍 넘긴 자리에서 돌아보면, 우리도 저마다 무언가를 꽤 쌓아 왔습니다. 재산일 수도, 경력일 수도, 혹은 오랜 자존심일 수도 있겠지요. 그것들을 지키느라 어느새 마음의 곁이 비어 버린 건 아닌지 문득 돌아보게 됩니다.
삭개오 이야기는 '다 버리라'고 다그치지 않습니다. 다만 묻습니다. 무엇을 움켜쥐고 있는지, 그리고 그 손을 조금 펴면 누구에게 흘러갈 수 있는지를요. 나이가 든다는 건 어쩌면, 채우는 법보다 흘려보내는 법을 익혀 가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잊지 말 것은, 그 모든 변화가 '먼저 불린 이름' 다음에 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먼저 이름을 불러 주는 자리에 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한 사람의 나무를 흔들어 내려오게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 곱씹어 볼 물음
- 나는 지금 무엇을 가장 꽉 움켜쥐고 있나요? 그 손을 조금 편다면, 무엇이 흘러갈 수 있을까요?
- 누군가 나의 '잘못'보다 나의 '이름'을 먼저 불러 준 적이 있나요? 그때 내 마음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 나는 누구의 이름을, 그가 변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다정하게 불러 줄 수 있을까요?
나무 위로 올라간 것은 그였지만, 먼저 멈춰 서서 올려다보신 분은 따로 계셨습니다.